조선왕실 의궤가 지방자치단체 일선 공무원의 노력으로 29년만에 국가 지정 보물이 됐다.
문화재청은 지난달 3일 영조대왕 태실 석난간조배 의궤(英祖大王 胎室 石欄干造排 儀軌)를 규장각에 보관된 다른 조선 왕실의궤 등과 함께 보물(1901호)로 지정했다.
이 의궤는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무성리에 있는 영조 태실의 설계도 격인 서류다.
영조대왕 3년인 1725년 제작된 필사본으로 추정된다.
일자별로 태실을 조성한 경위, 지방별로 동원된 역군(役軍), 장인(匠人)의 인원수와 수요물자의 내역, 태실의 각종 석조물과 태실비의 형태 등 세부내용까지를 상세하게 기록된 조선 왕실의궤의 하나다.
조선 왕실 의궤는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가례(嘉禮)등을 치를 때 후세의 참고를 위하여 그와 관련된 내용을 글과 그림으로 자세하게 정리한 책이다.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조선만의 독특한 전통으로 예법과 기록문화를 중시하는 조선 시대의 통치이념을 담았다는 점에서 200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런 중요한 사료가 하마터면 그대로 사라질 뻔했다.
이 의궤가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은 29년 전인 1987년이다.
당시 청원군 문화공보실에 누군가가 이 의궤를 전달했다.
이 책자는 영조 태실의 봉지기로 일했던 자손인 낭성면 무성리 이모씨 집 다락에 보관돼 있던 것을 한 향토 사학자가 찾아낸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 책을 찾은 인물과 어떤 경로를 통해 청원군에 전달됐는지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당시 청원군에서는 누구도 이 책자가 얼마나 중요한 사료인 줄 몰랐다. 그래서 군청 공보실 내 캐비닛에 다른 서류와 함께 보관했다. 말이 좋아 보관이지 다른 서류와 뒤섞여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이 고물을 예사롭지 않게 여긴 담당 공무원의 노력으로 이 의궤는 국보 반열에 오르게 됐다.
이 보물이 뒤늦게 빛을 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당시 청원군청 문화공보실에서 근무하던 이규상(현 청주고인쇄박물관 운영사업과장)씨였다.
전문가가 없어서 문화재 업무까지 함께 맡았던 그는 책 표지가 천으로 만들어졌고, 글씨체도 좋아 역사학적으로 중요한 사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문에 조예가 깊은 향토학자에게 해석을 의뢰했다.
그 결과, 이 책자에 깜짝 놀랄만한 사실이 기록됐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혹시나 해서 책을 해석해 보니 영조 3년의 역사가 줄줄이 기록돼 있었다"며 "이런 중요한 자료가 그대로 묻히도록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무렵부터 주말이나 휴일을 이용해 현장을 답사하고, 관련 자료를 모아 충북도에 문화재 지정을 신청했다. 그렇게 발품을 판 3년여 노력 끝에 1990년 12월 충북 유형문화재 170호로 지정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청원군에 수장고가 없던 탓에 이 의궤는 장기간 문화공보실의 서고에 보관됐다. 1997년 청원군이 문의문화재단지를 건설하면서 이 의궤는 겨우 이곳 수장고를 안식처로 삼을 수 있었다.
2014년 청주·청원이 통합되면서 이 의궤는 현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씨는 이 의궤의 중요성을 확인하면서 지역 향토 문화재에 관심을 가졌고, 6급으로 승진해 문화공보실 공보담당을 맡은 2005년 조선 시대 왕가의 태실을 집대성한 '한국의 태실'이라는 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 책에는 영조, 인성군 태실(청주시 문의면) 등 5개 태실의 위치 등을 상세하게 분석했으며 아지(阿只), 태함(胎函), 태봉(胎封, 胎峯) 등 태의 어원 및 지리적 조건, 태봉의 구조와 관리, 관리 소홀에 따른 처벌 등도 기술했다.
이 책에는 김유신 장군 태실 등 충청도에 위치한 태실과 조선 왕조 태실조사 일람표 등도 실었다.
그의 이런 노력 덕에 사학계는 이 의궤에 주목하게 됐고, 결국 군청 캐비닛에서 묻힐뻔했던 이 의궤는 보물로 지정돼 후세에 역사의 기록을 남기는 빛을 발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우연히 접한 의궤가 국가 보물로 지정돼 너무 기쁘다"며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 작은 보탬을 줄수 있게 돼 뿌듯하다"고 환하게 웃었다.
출처 : 연합뉴스 / 변우열 기자 bwy@yn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