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무관님 참 예쁘세요. 앞으로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서울 한 자치구 구청 공무원 A씨(26)는 책상에 있는 쪽지를 발견하고 소름이 끼쳤다. A씨는 사회복지팀에서 행정업무를 담당해 민원업무와는 무관한데도 모르는 민원인이 사무실에 들어와 자기 책상에 쪽지를 남겨둔 것이다. 이후에도 해당 민원인의 사무실 침입은 지속됐다.
먹을 것과 커피 등을 쪽지와 함께 남겨두는 일도 있었다. A씨는 점점 불안해졌지만 구청엔 출입 보안문이 따로 설치되지 않아 민원인의 출입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A씨는 "얼굴도 모르는 민원인이 몰래 스토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무섭다"고 전했다. 막무가내인 민원인들 때문에 공무원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일선 구청은 시민과 맞닿은 행정 기초자치단체로 하루에도 민원인이 수백여 명 방문한다. 불만을 가지고 구청을 방문하는 민원인이 적지 않다 보니 사건·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지난달 마포구청에서는 재개발지역 철거민들이 정보 공개를 요구하며 구청에 휘발성 액체인 시너를 뿌리고 소동을 벌였다. 노원구청에서는 집 주변 공사장의 소음이 시끄럽다며 민원인이 석유통을 들고 와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폭행사건도 급증하고 있다. 11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민원 공무원에 대한 폭행 건수는 지난해 92건에서 올해 1~8월 143건으로 급증했다. 월평균 횟수로 보면 7.7건에서 17.9건으로 1년 새 2.3배 늘어난 셈이다. 특히 경기도는 22건(2017년)에서 43건(올해 1~8월)으로 증가했다.
지난 10월 도봉구청에서는 민원인이 "기초연금액 인상으로 인한 생계급여 감소를 수긍할 수 없다"며 생활보장과 관계자에게 욕설과 폭언을 퍼부은 뒤 쇼핑백으로 때리고 발로 차는 폭행사건이 발생했다. 7월에는 부산 진구에서 한 민원인이 복지공무원에게 금품을 요구하며 폭언·폭행을 하기도 했다.
주민센터 창구에서 각종 서류를 발급해주는 공무원 중에는 방광염에 걸리는 직원도 있다. 서울시 서초동 동사무소 관계자는 "화장실에 잠시 다녀오려고 하면 `왜 내 순서에 화장실을 가느냐`며 항의하거나 째려보는 주민들 때문에 화장실 가는 걸 참을 때가 많다"며 "조금이라도 지체되는 걸 참지 못하고 분풀이하는 주민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크다"고 토로했다.
구청에 무단침입해 벌이는 단체 시위와 농성도 심각한 수준이다. 양천구청은 최근 사무실에 난입해 자리 잡고 고성을 지른 민원단체를 경찰에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고소했다. 강남구청에서도 전국철거민연합회가 재개발 사업장의 철거 반대를 주장하며 수시로 구청 내부로 진입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남구청 관계자는 "구청에 보안문이 없어 시위대가 진입하려고 할 땐 어쩔 수 없이 청사 외부 방화셔터를 내린다"며 "그로 인해 애꿎은 민원인들이 피해를 본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서류업무를 보고 민원 상담을 진행하는 곳은 대부분 구청 1층에 마련돼 있다. 그 외 구역은 공무원들이 사무업무를 보는 곳임에도 대부분 구청엔 보안문이 없다. 서울시 산하 25개 구청 중 보안문을 설치하지 않은 곳은 17개에 달했다. 나머지 8개 구청은 보안문이 설치됐지만 근무시간에는 상시 개방해 사실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구청과 달리 서울시청이나 도청 등 광역자치단체들은 대부분 출입 보안문을 갖추고 있다. 민원인들은 개인 신원과 관련 부서 담당자 확인을 받고 출입증을 수령한 뒤 입장할 수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서울시는 외부인들 시위가 많고, 무단으로 침입하려는 경우도 잦아서 보안게이트를 설치하게 됐다"며 "각 구청의 출입 보안문 설치 여부는 구청 내부적으로 알아서 판단할 문제"라고 밝혔다.
의정부시는 최근 시 단위 기초자치단체 중 처음으로 1억2000만원을 들여 출입 시스템을 설치했다. 2015년 민원단체들의 상습적인 시청 내부 진입으로 시장실을 무단 점거 당한 바 있다. 최근에는 새누리장애인부모연대가 시청 내부에 현수막을 설치하고 점거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의정부시 관계자는 "현 정부 들어서 민원인 농성에 대해 경찰을 부르는 등 강경 대응하기 어려워졌다"며 "일각에서는 (출입 시스템이) `시민차단기`라고 표현하는데 선량한 시민과 공무원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고 말했다.
염흥열 순천향대 정보보안학과 교수는 "민원인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과 공무원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분리해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행안부는 폭행사건 발생 시 인근 경찰서에 바로 호출할 수 있는 비상벨을 민원실에 설치할 예정이다. 경기 용인시, 대전 대덕구가 비상벨을 설치해 폭행에 대응하고 있는데, 이를 전국적으로 확대하겠다는 방침이다.
출처 : 매일경제 / 나현준 기자, 김유신 기자, 차창희 기자
